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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 친필 간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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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산지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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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 친필 간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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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38 x 세로 23

(종이 먹)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선생은 조선후기 이조판서, 좌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학자로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난 두각을 보였습니다.


송시열은 문장과 서체에서도 뛰어났다. 문장은 한유(韓愈)·구양수(歐陽修)의 문체에 정자(程子)·주자의 의리를 기조로 했기 때문에 웅장하면서도 유려하고 논리적이면서도 완곡한 면이 있었다. 특히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
시·부(賦)·책(策)·서(序)·발(跋)·소차(疏箚)·묘문 등 모든 글에 능했으나, 특히 비(碑)·갈(碣)·지문(誌文) 등 묘문에 명성이 있어 청탁을 받아 지은 것이 수백 편에 이르렀다. 그 중에서도 영릉지문(寧陵誌文)주 12)은 명문으로 손꼽힌다.
서체는 처음 안진경체(顔眞卿體)를 익히다가 뒤에 주자를 모방하게 되어 정체(正體)를 잃었으나 매우 개성적인 경지에 이르러 창고(蒼古)하고 힘에 넘치는 것으로 평판이 있었다. 그 글씨를 받아 간 사람들이 무수히 많았고 현재도 많이 전하고 있다.


아주 강건하고 힘이 넘치는 문장으로 평판이 높았다는 소문에 맞게 힘있는 필치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게묘년 10월 7일 작성되었습니다.


송시열(宋時烈) 수결이 있습니다.



약력


송시열은 조선의 문신·성리학자이다. 조선국 중추부영사 등을 지냈다. 그는 주자학의 대가이자 당색으로는 서인, 분당 후에는 노론의 영수이다. 본관은 은진이다. 이언적, 이이, 이황, 김집, 박세채와 함께 인신으로서 최고 영예인 문묘와 종묘 종사를 동시에 이룬 6현 중 하나이다.

충청도 옥천군구룡촌(九龍村) 외가에서 태어나 26세(1632) 때까지 그곳에서 살았다. 그러나 뒤에 회덕(懷德)의 송촌(宋村)·비래동(飛來洞)·소제(蘇堤) 등지로 옮겨가며 살았으므로 세칭 회덕인으로 알려져 있다. 8세 때부터 친척인 송준길(宋浚吉)의 집에서 함께 공부하게 되어, 훗날 양송(兩宋)으로 불리는 특별한 교분을 맺게 되었다.
12세 때 아버지로부터 『격몽요결(擊蒙要訣)』·『기묘록(己卯錄)』 등을 배우면서 주자(朱子)·이이(李珥)·조광조(趙光祖) 등을 흠모하도록 가르침을 받았다.
1625년(인조 3) 도사 이덕사(李德泗)의 딸 한산이씨(韓山李氏)와 혼인하였다. 이 무렵부터 연산(連山)의 김장생(金長生)에게서 성리학과 예학을 배웠고, 1631년 김장생이 죽은 뒤에는 김장생의 아들 김집(金集) 문하에서 학업을 마쳤다.
27세 때 생원시(生員試)에서 「일음일양지위도(一陰一陽之謂道)」를 논술하여 장원으로 합격하였다. 이때부터 학문적 명성이 널리 알려졌고 2년 뒤인 1635년에는 봉림대군(鳳林大君)주 01)의 사부(師傅)로 임명되었다. 약 1년 간의 사부 생활은 효종과 깊은 유대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병자호란으로 왕이 치욕을 당하고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잡혀가자, 좌절감 속에서 낙향하여 10여 년 간 일체의 벼슬을 사양하고 전야에 묻혀 학문에만 몰두하였다.
1649년 효종이 즉위하여 척화파 및 재야학자들을 대거 기용하면서, 송시열에게도 세자시강원진선(世子侍講院進善)·사헌부장령(司憲府掌令) 등의 관직을 내리자 비로소 벼슬에 나아갔다.
이 때 송시열이 올린 「기축봉사(己丑封事)」는 정치적 소신을 장문으로 진술한 것인데, 그 중에서 특히 존주대의(尊周大義)주 02)복수설치(復讐雪恥)주 03)를 역설한 것이 효종의 북벌 의지와 부합하여 장차 북벌 계획의 핵심 인물로 발탁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다음 해 2월 김자점(金自點) 일파가 청나라에 조선의 북벌 동향을 밀고하여 송시열을 포함한 산당(山黨) 일파가 모두 조정에서 물러났다. 그 뒤 1653년(효종 4)에 충주목사, 1654년에 사헌부집의·동부승지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사양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1655년(효종 6)에는 모친상을 당하여 몇 년간 향리(鄕里)에서 은둔 생활을 보냈다. 1657년 상을 마치자 곧 세자시강원찬선(世子侍講院贊善)이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대신 「정유봉사(丁酉封事)」를 올려 시무책을 건의하였다. 1658년 7월 효종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찬선에 임명되어 관직에 나갔고, 9월에는 이조판서에 임명되어 다음 해 5월까지 왕의 절대적 신임 속에 북벌 계획의 중심 인물로 활약하였다.
그러나 1659년 5월 효종이 급서한 뒤, 조대비(趙大妃)의 복제 문제로 예송(禮訟)이 일어나고, 국구(國舅) 김우명(金佑明) 일가와의 알력이 깊어진 데다, 국왕 현종에 대한 실망으로 그 해 12월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이후 현종 15년 간 조정에서 융숭한 예우와 부단한 초빙이 있었으나 거의 관직을 단념하였다. 다만 1668년(현종 9) 우의정에, 1673년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잠시 조정에 나아갔을 뿐, 시종 재야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재야에 은거하여 있는 동안에도 선왕의 위광과 사림의 중망 때문에 막대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사림의 여론은 송시열에 의해 좌우되었고 조정의 대신들은 매사를 송시열에게 물어 결정하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1674년 효종비의 상으로 인한 제2차 예송에서 송시열의 예론을 추종한 서인들이 패배하자 예를 그르친 죄로 파직, 삭출되었다. 1675년(숙종 1) 정월 덕원(德源)으로 유배되었다가 뒤에 장기(長鬐)·거제 등지로 이배되었다.
유배 기간 중에도 남인들의 가중 처벌 주장이 일어나, 한때 생명에 위협을 받기도 하였다.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들이 다시 정권을 잡자, 유배에서 풀려나 중앙 정계에 복귀하였다. 그 해 10월 영중추부사 겸 영경연사(領中樞府事兼領經筵事)로 임명되었고, 또 봉조하(奉朝賀)의 영예를 받았다.
1682년(숙종 8) 김석주(金錫胄)·김익훈(金益勳) 등 훈척들이 역모를 조작하여 남인들을 일망타진하고자 한 임술삼고변(壬戌三告變) 사건에서 김장생의 손자였던 김익훈을 두둔하다가 서인의 젊은 층으로부터 비난을 받았다. 또 제자 윤증(尹拯)과의 불화로 1683년 노소분당이 일어나게 되었다.
1689년 1월 숙의 장씨가 아들(후일의 경종)을 낳자 원자(元子)주 04)의 호칭을 부여하는 문제로 기사환국이 일어나 서인이 축출되고 남인이 재집권했는데, 이 때 세자 책봉에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 그러다가 그 해 6월 서울로 압송되어 오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죽었다.
그러나 1694년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다시 서인이 정권을 잡자 송시열의 억울한 죽음이 무죄로 인정되어 관작이 회복되고 제사가 내려졌다. 이 해 수원·정읍·충주 등지에 송시열을 제향하는 서원이 세워졌고, 다음 해 시장(諡狀) 없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이 때부터 덕원·화양동을 비롯한 수많은 지역에 서원이 설립되어 전국적으로 약 70여 개소에 이르게 되었는데, 그 중 사액서원만 37개소였다.
행적에 대해서는 당파간에 칭송과 비방이 무성했으나, 1716년의 병신처분(丙申處分)과 1744년(영조 20)의 문묘배향으로 학문적 권위와 정치적 정당성이 공인되었다. 영조 및 정조대에 노론 일당전제가 이루어지면서 송시열의 역사적 지위는 더욱 견고하게 확립되고 존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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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추가일시 : 2020/07/31 12:40
이 작품은 '송시열'이라고 쓰여진 점이 매우 특기할만한 간찰입니다 보통은 호를 쓰거나 아니면 "時烈'만 쓰기 때문입니다 오랜 세월 약 400년을 견뎌 온 친필작품입니다. 영의정을 역임하고 우리나라 중기 사상계에 중추적 역할을 하신 분입니다 '조선장지'의 보존 능력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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